본문 바로가기
[ My Bookshelf ]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리뷰 | 데킬라 한 잔과 바꾼, 나의 경계선에 대하여

by 환이s 2026. 10. 5.
728x90
반응형


시작하기 전에

 

스물다섯의 나는

자기 전에 데킬라를 딱 한 잔 마셨다.

 

술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야 잠이 왔다.

 

오랫동안 그 버릇을

그냥 피곤해서 생긴 거라고 여겼다.

 

그 한 잔에

다른 이름을 붙여준 책이 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작가가 쓴 에세이다.

 

무례한 말 앞에서

화내거나 울지 않고

내 입장을 말하는 법을 다룬다.

 

대처법만 적힌 책은 아니다.

 

연애와 가족, 자존감까지

관계 전반의 이야기가

다섯 부에 걸쳐 담겨 있다.

 

그중에서 내가 붙잡힌 건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였다.

 

웃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서평이라기보다

그 한 잔에게 보내는

뒤늦은 답장에 가깝다.


말을 잘한다고 믿었던 스물다섯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

그 시절이 통째로 딸려 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뭘까,

치열하게 묻던 시기였다.

 

답은 몰랐지만

하나는 안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무심결에

나는 말을 잘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 하나로

전공과 아무 상관 없는

영업직에 뛰어들었다.

 

일은 주 7일이었다.

퇴근은 늘 밤 11시였다.

 

나를 갈아 넣는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계약을 미루던 고객들은

웃으며 말하곤 했다.

 

"경쟁사 쪽에서는 이만큼 더 감가 해준다는데,

여기는 뭐 없어요?"

 

"다른 데는 계약하면

추가로 이것까지 해준다던데, 뭐 없나요?"

 

참 많이 듣던 말이다.

 

무례하다고 하기엔 애매해서

더 어려운 말들이었다.

 

영업은 원래

별것 아닌 것도

큰걸 내주는 것처럼 건네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돌려 말할 줄 몰랐고,

거짓말을 못했다.

 

말을 잘한다고 믿고 들어온 자리에서

내 가장 큰 단점을 알게 된 셈이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웃는 것 말고는 건넬 말이 없었다.

 

말로 채우지 못한 자리는

시간과 몸으로 메웠다.

 

내 잘못이 아닌 일에도

먼저 죄송하다고 했다.

 

그게 프로라고 생각했다.

 

책은 조용히 짚어준다.

 

웃으며 넘기는 것과

웃으며 대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멈추라고 말하지 않으면

무례는 계속된다고.

 

참는 사람은 배려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고

배울 뿐이라는 것.

 

그 시절의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단점이 방법이 되는 순간

 

페이지를 넘기다

무례한 말에 감정을 싣지 않고 답하는 법에서

손이 멈췄다.

 

저자는 몇 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그 말이 문제라는 걸 짚어주기,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만들기,

상대가 쓴 단어를 그대로 돌려주기,

무성의하게 반응하기,

유머로 받아넘기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 농담이랍시고

"이타적으로 생겼네"라고 하면,

"못생겼다는 뜻이죠?"하고

천진하게 되묻는 것.

 

하나같이

화를 내지 않는 방법들이다.

 

화를 내면

내 에너지가 먼저 닳고,

 

참으면

그 감정이 밤까지 따라온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건조하게, 담백하게

한마디 하라는 것.

 

읽다가 조금 웃음이 났다.

 

돌려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것.

 

영업에서는 단점이던 그것이

이 책에서는 방법이었다.

 

그 대목을 읽는데

그 시절의 침대가 떠올랐다.

 

밤 11시에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불을 끄고 누우면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몸은 바닥인데

가슴만 혼자 깨어 있었다.

 

낮에 삼킨 말들이

천장에 하나씩 떠올랐다.

 

그 한 잔은 그렇게 생긴 버릇이었다.

 

두 잔은 아니었다.

항상 한 잔이었다.

 

목이 뜨거워지고 나서야

겨우 눈이 감겼다.

 

그때는 그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나는 그냥

하지 못한 말들을

한 잔으로 눌러두고 있었던 것 같다.

 

많이 외로웠다.

 

그 단어를 쓰는 것조차 사치 같아서

그냥 피곤하다고만 했다.

 

데킬라 한 잔을 따르던

스물몇 살의 내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나는 왜 나를 갈아 넣었을까

 

책을 덮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는 왜 그때

그렇게까지 나를 갈아 넣었을까.

 

성실해서였다고

오래 믿어왔다.

 

아니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말 잘하는 사람,

소통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던 거다.

 

말을 잘한다고 믿었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

나는 말 대신 나를 내주고 있었다.

 

그건 소통이 아니라

소모였다.

 

책은 자기표현도

근육 같은 거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고,

작은 말부터 연습해야 는다고.

 

좋았던 건

방법이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말 대신

무슨 말을 하면 되는지 알려준다.

 

다만 책 속 대답들을

내 입으로 그대로 옮기기엔

조금 망설여졌다.

 

상대가 상사이거나 고객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그래도 문장을 외우는 책이 아니라

태도를 빌려오는 책이라고 생각하니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오래된 습관이

책 한 권으로 바뀌진 않는다.

 

여전히 거절은 어렵고,

하고 나면 조금 미안하다.

 

다만 하나는 달라졌다.

 

불편한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한 번은 말하게 됐다는 것.

 

"그 말은 조금 불편하네요."

 

목소리가 떨려도,

웃으면서 해도 괜찮았다.

 

말하고 나면

그 말이 밤까지 따라오지 않는다.

 

경계선은

사람을 밀어내는 벽이 아니라,

다정함이 바닥나지 않게 지키는

울타리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이런 분께 권하고 싶다

 

무례한 말을 듣고도

분위기 때문에 웃어넘기는 사람,

 

거절하지 못한 부탁을 안고

혼자 야근하는 사람,

 

낮에 삼킨 말이

밤마다 다시 떠오르는 사람.

 

그런 분들껜

이 책을 한 번 펼쳐보라고 권하고 싶다.

 

본인이 예민한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느라 지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마무리하며

 

요즘 나는

데킬라 없이 잠든다.

 

대단한 사람이 된 건 아니다.

 

다만 침대에 누웠을 때

심장이 조용하다.

 

받아치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인 줄 알았다.

 

읽고 보니

이렇게 묻는 책이었다.

 

모두에게 다정하느라

 

정작 나에게는

무례하지 않았냐고.

 

스물다섯의 난 최선을 다했다.

 

 

 

728x90
반응형